아이폰으로 업무하기-매우 스마트한 두 달 반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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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두 달 반 동안 만든 15개 숏폼 콘텐츠의 재생 횟수다. 유튜브,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을 합산한 터라 적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숫자에는 숨은 비밀이 하나 있다. 바로 나의 아이폰 SE2로 일궈낸 성과라는 것.
나는 올해 1월 초, 건강보험 자격 득실을 기준으로 대략 스물네 번째(스물다섯인가..) 회사에 입사했다. 윤석열 덕분에 아직 마흔아홉살인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하기 직전에 프리랜서 신분이었다. 불안정한 벌이 탓에 마구 이력서를 뿌려댔는데, 이곳 사장이 연락한 것이다. 면접을 봤는데 사장이 바로 확답을 주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홍보/마케팅 계획서를 보내달라는 메일을 받았다. 아이디어만 쏙 빼가려는 걸까, 의심이 들었지만, 그냥 노션으로 깔끔하게 한 장으로 정리해 보냈다. 다시 며칠 후 사장으로부터 다시 만나자고 연락받았다. 두 번째 마주한 자리에서 사장은 제안서에 구체적인 방안이 없어 아쉽지만, 같이 일하자고 했다.
그러나 옵션을 걸었다. 프리랜서로 일하자는 것. 둘째 아들을 돌봄교실에 보내야 하기에 4대 보험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대신 희망연봉은 낮춰서 제시했다. 사장은 그럼 3개월은 인턴으로 하고 월 20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다. 3개월이 지나면 4대 보험도 들어주고 희망 연봉도 주겠다고 했다. (이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젠장.)
아무리 이직이 잦기로서니 경력이 25년인데 수습 기간을 두고, 게다가 최저임금도 안 되는 돈이라니. 더 최악인 것은 급여는 전월에 일한 것을 익월 15일에 지급한단다. 한 달 반을 손가락만 빨고 있으란 소리였다. 뭔가에 홀렸을까. 사장 말에 오케이하고 다음 날부터 출근하기로 했다. 회사를 나서는 내 뒤로 이런 말이 들렸다.
개인 노트북은 가져오세요~
첫날은 노트북을 들고 출근했다. 그런데 나보다 1년 반 정도 먼저 입사한 동료의 컴퓨터를 보고 기겁했다. 아직도 운영체제가 윈도7이었다. 영원히 내 노트북으로 일할 것만 같아 다음 날부터 아이폰만 들고 출근했다. 스마트폰으로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사장에게도 측은지심이 생겨 컴퓨터를 사주지 않겠냐는 생각에.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 두 달 반에 가까워지는 오늘까지 사장은 컴퓨터를 사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온갖 핑계를 댔다. 심지어 외주비용을 지급하지 않아 빚쟁이의 전화를 받는 게 내 업무의 일환이었다. 사장은 직접 찾아오는 빚쟁이를 피해 일찍 퇴근하는 일도 잦았다. 바보 같은 내 선택을 자책했지만, 이미 스물네 번이나 자책한 터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것이고, 첫 월급은 한 달 반 후에나 받으니 아이폰으로 최대한 효율적인 업무 꾀를 냈다. 각종 보고는 노션으로 작성해 링크를 보내거나 출력이 필요하면 라이트닝-유선랜 젠더를 연결해 네트워크로 프린트했다. (이마저도 맞는 애플리케이션을 찾느라 사흘 정도 헤맸다.)
이 회사는 꼴에, NAS에 모든 파일을 담고 있었다. 다행히 NAS 애플리케이션이 있어서 접속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인디자인 파일은 열어볼 수 없었다. IDML 확장자를 열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이 있었지만, 디자이너에게 그 많은 파일을 다 변환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HWP 파일을 여는 일도 고역이었다. 폴라리스 오피스를 쓰면 되겠지만, 무료 버전은 광고를 봐야 하고, 유료 결제는 사장이 해줄 리 만무했다. 할 수 없이 한컴독스를 썼는데,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아이폰에서 바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기를 한 번 더 거친 후에 앱을 열어야 한다.
그나마 수월하게 작동한 건 포스트 애플리케이션이었다. 화면이 작고 가로회전이 안 되는 게 단점이지만 모든 기능이 잘 작동했다.
동영상 편집도 PC에 비해 정교함이 부족하지만 수월한 편이었다. 나는 주로 무료 앱 clips나 유료 앱 movavi clips를 무료 체험 기간만 사용했다.
카드 뉴스를 만들거나 이미지 제작이 필요하면 어도비 익스프레스 앱이나 캔바 앱을 사용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면서 노안과 목디스크에 시달리긴 했지만, 스마트폰으로 업무가 아예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중간에 2~3일 정도는 삼성 S10E를 당근해 dex모드로 사용해 봤지만, 포스트 카드 뉴스 작성 호환이 되지 않았고, ios에 익숙한 내게는 불편해서 다시 아이폰을 썼다.
지금 이 브런치 글도 스마트폰으로 쓰려다, 회계 담당자로 일하는 사장의 딸이 일찍 퇴근해 그 자리에 있는 PC로 쓰고 있다. 그런데 습관이 무섭다고 했던가. 두 달 반 가까이 스마트폰으로 업무를 하다 보니 이제는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게 낯설다. 이러다가 나도 작가 문화류씨처럼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리라는 착각도 든다.
며칠 전 와이프가 핸드폰으로 업무를 그렇게 척척 해내니까 사장이 컴퓨터를 안 사주는 것이라 칭찬? 핀잔?을 줬다. 남편은 아내한테 개기지 말고 아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신혼 초에 개기고 스물다섯 번째 회사에 다닌 경험자의 말이니 이 땅의 모든 남편이여, 부디 아내 말을 잘 들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