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나의 아이폰 11 pro는 갔습니다.

2022년 8월 23일 화요일 저녁 무렵 갑자기 아이폰 화면이 깜박깜박거렸다.

며칠 전 여행을 다녀와서 용량이 꽉 차서 버벅대나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하던 서칭을 했다.

그런데 깜박거림이 좀 더 심해지며 세로 줄무늬가 생겼다. 그때 나는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오빠 내 핸드폰 이상해!"라고 말하며 오빠에게 핸드폰을 들이미는 순간 화면은 힘없이 투두.. 둑.... 영화의 마무리 장면처럼 페이드아웃하며 화면이 꺼지고 말았다.

아이폰... 너 나랑 천년만년 살기로 약속했잖아

내가 아무리 떨어뜨리고 굴려도 너 튼튼하게 살아있었잖아

갑자기 왜 그래

이렇게 갑자기 왜 그래

2019년 11월 30일. 널 처음 만난 날이야

눈이 세 개나 달린 널 보며 조금 괴상하다고도 생각했지만 나도 이제 새로운 만남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가로수길 애플스토어에서 널 만났지

"와! 여~러~분~! OOO 님이 오늘 생일을 맞이해서 아이폰을 구입하셨대요! 훠우~!"라고 말하며 축하해 주는 분위기의 애플스토어에서 나한테도 그럴까 봐 두려움에 떨며 조용히 널 데리고 나왔어.

이전 아이폰보다 너무 무거워서 가끔은 손목이 아프기도 했지만

나에게 너무 익숙한 사진 색감,

그리고 망원렌즈의 추가로 확대 샷을 즐겨찍는 나에겐 큰 힘이 되었지.

손에 가시가 달린 듯 매번 땅바닥에 널 떨어뜨려도 너는 절대 깨지지 않았어

변기에 담근 적도 있었고, 손을 씻다가 널 떨어뜨린 적도 허다했지

모래사장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널 모레에 박아 세워놓기도 했어

그래도 넌 꿋꿋이 버텨주었어

코로나가 시작되고 마스크를 사용하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너에게 조금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 말야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내 얼굴이 낯설었는지 잠금을 해제해 주지 못하고 매번 비밀번호를 누르게 했던 너

난 그때 잠시 다른 아이폰을 상상했어.

'지문인식으로 잠금을 해제해 주는 다른 아이폰을 만나고 싶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

너에게 난 다시 적응해갔고 어느새 넌 내 일상에서 제일 익숙한 내 몸 같은 존재가 되어있었어

2022년 8월.

널 만난 지 2년이 넘었고 3년이 되기 3-4개월 남은 시점

너와 난 괌으로 여행을 갔어. 너에게 바다 세상을 구경해 주고 싶은 마음에 튼튼한 방수케이스도 함께 데려갔지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너와 나는 바닷속을 신나게 헤엄쳤어. 바지 주머니에 그냥 넣어놓기만 했는데 넌 절대 빠지지도 않고 내게 꼭 붙어있었지

여행 오 일차

그날도 난 널 바다에 데려갔어. 바다에 얼른 들어가고픈 마음에 너의 방수케이스가 완전히 맞물렸는지 확인하지 못한 채 너는 언제나 괜찮을 거라는 믿음으로 바다에 풍덩 했지

그런데 늘 방수케이스를 끼고도 터치가 잘 되던 니가 터치가 잘 안되는 거야.

자세히 살펴보니 방수케이스의 일부 부분이 완전히 맞물리지 않아 바닷물과 너는 잠깐 만났고(아주 잠깐, 몇 방울 아니 몇십 방울 정도 밖에 안 되었을 거야) 나는 널 꺼내 젖은 수영복으로 닦았어.

그날 수영이 끝나고 방수케이스에서 꺼냈을 때 너는 또다시 멀쩡했어. 페이스 아이디 인식이 되지 않는다는 알람만 빼고는.

난 '역시 나의 아이폰은 뭔가 달라도 달라'라며 널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지

2022년 8월 23일은 그날 이후 4일이 지난 뒤였어.

너는 그 4일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화면을 꺼버리고 나랑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은 거였구나

그런데 넌 나에게 너와 나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옮길 시간을 주지 않았지

아주 뜨거워진 널 아이스팩에 올려놓으며 "제발 제발"을 외쳤어

넌 아주 잠깐 '호릿.. 호리릿..'하며 아주 잠깐씩만 화면을 비추다 결국 완전히 꺼져버렸고

깜깜한 화면 속 울려대는 알람들에 나는 불안감을 느꼈지

널 고칠까 말까 고민하다

오빠는 너의 액정을 셀프 수리해 보기로 했어

넌 이미 만신창이었지만 화면이라도 갈아 소중한 추억들을 옮기기로 한 거였지

널 열어보니 내 마음이 너무 아파지더라

너의 나사는 군데군데 녹슬어 있었고,

테두리 부분엔 기타 이물질들이 묻어있었어

미안해 너무 미안해

근데 내 사진들은 두고 가..

Y자 드라이버가 필요한 너는 안쪽까지 쉽게 열려주지 않았고

다음날 추가로 새로운 드라이버를 구입해 겨우 새로운 액정으로 갈아낄 수 있었어

셀프 수리로 새로운 액정을 얻게 된 너는,

나와 함께 우주에 가고 싶다는 듯

전면 카메라로 행성들의 공전주기를 보여주는 듯했지

후 이제 나는 널 정말로 놓아주려고 해.

왜냐하면 아이폰 14가 나의 마음을 두드렸기 때문이야

너무 비싼 가격에 고민도 조금 했지만

너와는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받아들이게 되었어.

미안해

아이폰 14를 데려오는 날 너를 한 번 더 만날게

정보를 교환하는 것까지만 부탁할게

아이폰 11 pro.

널 만나서 행복했다

나의 합격, 결혼, 여행 등 엄청난 변화의 시기를 함께 하며 든든하게 날 지켜준 너

되지도 않는 브이로그를 찍어보겠다며 길고 긴 영상을 담아 널 항상 포화상태로 두었던 게 너무 미안해

그렇지만 니가 있어서 어디 가서도 부끄럽지 않았고

너로 인해 내가 더 멋진 사람처럼 느껴졌어.

너 없는 지금, 갤럭시와 잠시 함께하고 있는 지금, 니가 너무 그립지만

꾹 참고 다음 사랑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을게

널 절대 잊지 못할 거 야

라뷰 11pro.........

넌 아픈 순간까지 최선을 다했다

너무 멋진 사진을 남겨줘서 고마워

넌 나의 숨과도 같은 존재였다

잘 가라

2019.11.30.~2022.08.23.

Eungela의 아이폰 11 pro와의 인연은 여기서 안녕

아 디 오 스. . ★